햇빛은 사과 껍질처럼 반짝였고,
바람은 나뭇잎 사이를 재잘거리며 지나갔다.
발끝에 닿는 흙은 따뜻했고,
하늘엔 새들이 무심한 선을 그리며 날았다.
그는 오늘도 길을 나섰다.
세상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 저쪽 숲 너머에는 뭐가 있어요?”
아프로디테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었다.
“아름다움도 있고, 위험도 있고, 너의 운명도 있겠지.”
헤르마프로드로스는 그렇게 작은 배낭을 등에 메고 떠났다.
헤르메스의 민첩함과 아프로디테의 눈부심을 동시에 가진 그는,
걷는 것만으로도 꽃들이 머리를 들고 나비가 그의 발끝을 따라다녔다.
어느 날, 그는 신기한 빛을 따라 낯선 호수에 다다랐다.
물을 들여다보자, 거울처럼 또렷하게 비친 건 익숙한 자신의 모습.
하지만—
“어라?”
그의 눈동자 너머, 다른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여긴 처음이지?”
맑은 목소리가 물 위에서 흘렀다. 물살은 소년의 발끝에 달라붙으며 장난쳤다.
“너 누구야?”
소년은 물가에 앉아 무릎을 구부렸다.
“나는 샐마키스. 이 호수의 주인이야. 친구가 없어서 이제는 누구든 반가워.”
샐마키스는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무릎까지 물에 들어선 소년을 바라보았다.
“넌 참 예쁘다. 근데 조금 외로워 보여.”
헤르마프로드로스는 당황했다.
누군가의 ‘아름다움’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말로 닿은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냥, 나야.”
샐마키스는 웃으며 다가왔다.
“그래서 더 좋아. 너는 너인 걸.”
소년은 어쩐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는 누구보다 엄마와 아빠를 사랑했지만,
가끔은 너무 다른 그들 사이에서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혼잣말하곤 했다.
달리기도 좋아하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빗는 것도 좋아했다.
어른들은 종종 고개를 갸웃했고,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그런데 이 호수의 소녀는 그냥 말했다.
“그냥 너여서 좋다고.”
그 순간, 물이 그의 손끝을 감쌌다.
그리고 물결이 말을 걸었다.
“하나가 되자. 넌 너고, 난 나지만 같이 있으면 새로운 무언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소년은 놀랐지만, 왠지 모르게 두렵지 않았다.
무겁지도 않았다.
그는 천천히 물속에 몸을 담갔고, 샐마키스는 그의 곁에서 속삭였다.
“내가 널 지켜줄게. 그리고 너도 나를 기억해줘.”
햇살이 기울었다.
헤르마프로드로스는 호수에서 나왔다.
그의 눈은 조금 더 깊어졌고, 머릿결은 어딘가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의 모든 ‘다름’이 이제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감싸안은 물의 기억을 품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이상한 아이, 조금 아름다운 아이.
그리고 아주 특별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참고한 그리스신화
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헤르마프로드로스는 호기심 많은 성격으로 온 세상을 여행하던 중, 어느 맑은 연못에서 샐마키스라는 님프와 만나게 된다. 샐마키스는 그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와 하나가 되길 바라고,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한 결과 두 존재는 하나로 융합되어 양성의 신적 존재가 된다.
헤르메스, 바람을 훔친 날 :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을 속인 신의 미소
헤르메스, 바람을 훔친 날 : 태어난 순간부터 세상을 속인 신의 미소
신은 말하지 않았다.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는 움직였고, 생각했고, 계획했다. 하늘이 어슴푸레 빛나던 새벽.마야의 품속은 따뜻했지만, 나는 그곳에 오래 있을 마음이 없었다. 손끝이 바닥을 짚
thefallengods.tistory.com
아프로디테의 사랑 : 피와 장미, 그리고 봄비
그가 돌아오는 봄이 오면, 나는 항상 울었다.기쁨도 슬픔도 모두 눈물이 되었다.사랑은 그런 것이니까. 아도니스.그 이름은 내 입에서 수없이 흘러나왔다.밤하늘을 울릴 만큼, 대지에 사무칠 만
thefallengods.tistory.com
아프로디테의 은밀한 선물 : 신들을 흔드는 작은 병
에게해를 건너는 바람은, 그날따라 유난히 달콤했다.아프로디테는 밀로스 섬 끝자락에 서 있었다. 반쯤 감긴 눈동자, 살짝 올라간 입꼬리.그녀는 오늘,신들에게 한 가지 장난을 걸기로 마음먹었
thefallengods.tistory.com
아르테미스 : 순결과 사냥의 여신
1. 아르테미스의 신적 출생아르테미스는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 중 하나로, 아폴론과 함께 출생하였다.그녀는 델로스 섬에서 태어났으며, 출생 직후 어머니 레토의 출산을
thefallengods.tistory.com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별빛 탄생 : 하나는 불멸, 하나는 죽음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별빛 탄생 : 하나는 불멸, 하나는 죽음
카스토르와 폴룩스,한 날 한 시에 울음을 터뜨린 두 생명.하지만 그들은 결코 같은 세계에서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카스토르는 인간이었다.육체는 강했지만, 피는 죽음을 기억했다.그의
thefallengods.tistory.com
'Greek Mythology > Fanfi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디세우스의 항해 : 파도 너머, 선택의 그림자 (2) | 2025.05.08 |
---|---|
파리스의 선택 : 그녀의 이름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7) | 2025.05.07 |
제우스의 연인들 #4 : 신의 얼굴을 본 여인, 세멜레 (4) | 2025.05.05 |
미노타우로스의 시선 : 미궁 속 마지막 밤 (4) | 2025.05.03 |
고요한 여신, 마이아 : 숲에 피는 봄의 숨결을 따라 (13) | 2025.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