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맑았던 어느 여름의 오후였다.
시르티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머리칼을 자꾸 귀 너머로 넘기고 있었고,
나는 그 바람이 고맙다고 느꼈다.
헥토르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왕자지만 무릎에 흙이 묻어 있고,
갑옷은 벗은 채 땀에 젖은 셔츠만 걸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반쯤 깎인 사과 하나가 들려 있었고,
내 눈은 그 사과보다
그가 눈을 감을 때의 속눈썹을 더 오래 바라보았다.
그는 웃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웃음이 내 하루를 흔들어놓았다.
그날 이후, 나는 이상해졌다.
신전에 앉아 기도를 올릴 때마다
눈을 감으면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신이 있다면, 널 나에게 맡겼을 리는 없을 텐데.”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이 나를 가만히 담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이유란 게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듯했으니까.
헥토르가 처음 내 손을 잡았던 날은
비가 왔던 저녁이었다.
왕궁의 뒷정원을 도는 좁은 길,
진흙과 나뭇잎 사이에서 발을 헛디딘 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품에 안았다.
“괜찮아요…”
내가 속삭였을 때,
그는 대답 대신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대었다.
“괜찮은 거짓말이군.”
그 한 마디에
심장이 너무 커진 것처럼 울렸다.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전사일지도 모르지만
그 안엔 아주 조심스러운 마음이 살고 있다고.
그 조심스러움은,
언젠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검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나를 향한 확신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우리는 짧고 깊은 여름을 살았다.
그는 말없이 곁을 내어주었고,
나는 그 곁에서
내 이름을 말하는 법을 잊고
그의 이름만 부르게 되었다.
“헥토르.”
그 이름은 바람을 가르는 화살 같기도 했고,
가슴 속에 숨겨진 불씨 같기도 했다.
그가 내 곁에 있었던 시간들은,
아무리 전쟁이 멀리서 다가온다 해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처음 내 손을 잡던 날,
처음 내 이름을 속삭이던 밤,
그리고 처음으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여름의 그늘.
그 모든 순간이 지금도 내 심장 안 어딘가에서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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