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이었고, 동시에 그 이름의 그림자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버려졌고,
떠밀리듯 흘러간 내 육신은 사슴 젖을 먹으며 연명했고,
낯선 땅의 왕에게 ‘자식’이라 불렸다.
나를 길러낸 손길은 따뜻했지만, 나는 늘 알았다.
내 피 속엔 산맥을 가르던 자의 분노와, 신의 업화를 짊어진 자의 기운이 흘렀다는 것을.
테우타스는 내게 이름을 주었고, 왕좌를 물려주었으며, 전장을 걷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바다 건너서 불길처럼 다가온 자들이 있었다.
아르고스의 왕들, 미케네의 자식들, 제우스의 후예들.
그들은 트로이로 향하고 있었지만, 내가 지키던 미시아 땅을 트로이의 전초기지라 착각했다.
그들은 내게 싸움을 걸었고, 나는 검으로 응수했다.
내 칼은 바람보다 빠르게 울부짖었고, 내 창은 적의 목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 아이—이름마저 몰랐던 청년 전사,
그가 내 허벅지를 찔렀을 때,
나는 내 운명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창날은 깊게 박혔다. 피는 멈추지 않았다.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나는 싸움을 멈추었고, 군을 물렸다.
의술사들이 불러졌다. 포도주로 씻고, 약초를 달여 바르고, 신들의 제단에 피를 바쳤다.
하지만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상처는 살아 있었다.
내 살속에서, 무언가—운명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너를 다친 자만이, 너를 낫게 하리라.”
델포이의 신탁은 나를 굴복시켰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상처는 단지 육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존의 부상이었다. 나는 내 피에 흐르는 헤라클레스의 분노를 이해했다.
모든 것이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나는 기어코 칼을 내려놓고, 그리스 진영으로 갔다.
적의 땅에, 적의 얼굴 앞에서 나의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물었다.
“나를 베었던 창, 그 조각이 아직 네 손에 있느냐?”
아킬레우스는 어렸다. 그러나 신의 피가 흐르는 그의 눈엔 전장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창날 끝을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조각을, 상처에 눌러주었다. 피가 솟았다. 그리고, 아물었다.
내 고통은, 나를 벤 자의 손으로 끝났다.
그날 이후 나는 그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트로이로 향하는 길을 아는 자는 오직 나 하나였다.
아이러니였다.
나를 다치게 한 자들의 전쟁을 위해, 나는 앞장섰다.
전장을 지나며 나는 깨달았다.
운명은 때로 칼날처럼 날카롭고,
신탁처럼 냉혹하며,
상처처럼 뼛속 깊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을 짊어질 수 있는 자만이, 왕이 된다.
나는 왕이었고, 전사였고, 한때는 적이었으며, 마지막엔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텔레포스,
헤라클레스의 피를 잇는 자로서,
나를 상처 입힌 세계를, 피로 안내한 예언의 지도로 남겼다.
참고한 그리스로마신화
텔레포스는 헤라클레스와 아우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미시아의 통치자가 되었고, 트로이 전쟁을 향해 출정한 그리스군의 오해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창에 의해 중상을 입지만, 신탁에 따라 아킬레우스의 창으로 상처를 치유받는다. 그는 이후 그리스군을 트로이로 이끄는 자가 된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 : 영웅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 이름들
헤라클레스의 후손들 : 영웅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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