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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k Mythology/Fanfiction

디케의 저울 : 눈을 가린 정의가 다시 눈을 뜨다

by The Fallen Gods 2025. 4. 24.

세상의 모든 무게는 그녀의 손 위에 있었다.

아침이면 디케는 산꼭대기의 바위에 앉아
수천의 인간 영혼을 천칭 위에 올렸다.


한쪽에는 거짓, 다른 한쪽에는 진실.
그녀는 눈을 가린 채, 조용히 저울의 균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 균형은 항상 무너져 있었다.
심지어 어린아이의 영혼조차
저울의 왼편, 어둠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왜지…?”

 

디케는 속삭였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오래 인간을 지켜봤다.


처음엔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순수했고,
거짓은 불안에서, 진실은 희망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거짓은 당연이 되고, 진실은 외면되었다.

 

그날 디케는 저울을 들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도시의 광장 한복판에 섰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며 속삭였다.

 

“정의란, 네게 어떤 모양이니?”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녀를 지나치며 욕했고,
누군가는 그녀의 손에 동전을 얹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눈을 들었을 때,
그 눈에 비친 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작은 소녀가 그녀 앞에 섰다.
어깨 위에는 먼지가 내려앉았고,
손은 얼룩져 있었지만, 눈은 맑았다.

 

“이거, 뭔데요?”

 

소녀는 그녀의 저울을 가리켰다.

디케는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을 재는 저울이란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사람 마음엔 무게가 있나요?”

“…있지. 무게가 같을수록, 평화가 온단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럼… 사람들이 그런 저울이 있는 줄 모르면, 그 무게도 모르는 거예요?”

 

그 말에 디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늘보다 오래 살아왔고,
모든 심판을 내려온 존재였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울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속이면서도, 그게 죄인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날 밤, 디케는 저울을 내려놓았다.
눈을 가린 천도 풀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인간의 얼굴을, 온전히 바라보았다.

슬픔도 있었고, 탐욕도 있었고,
그러나 그 안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연약한 진실도 있었다.

 

“정의는, 판단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속삭였다.

 

“정의는… 들여다보는 것이었구나.”

 

그 후로 디케는 심판을 멈췄다.
더 이상 누군가의 마음에 저울을 들이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 저울 하나를 심었다.

 

그건 외부에서 재는 무게가 아닌,
스스로 무게를 느낄 수 있도록 돕는 저울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정의의 신은 사라졌어.”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말했다.

 

“그녀는, 드디어 세상을 보기 시작한 거야.”

 

이제 저울은 산 위에 조용히 놓여 있다.
누군가가 다시 들기를 기다리며,
하늘과 땅 사이의 작은 균형으로,
그저 거기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 속, 작은 저울 하나가 생겨나길 바란다.

 

 

 

참고한 그리스신화

디케(Dike)는 고대 그리스의 정의의 여신. 제우스와 테미스의 딸로, 인간 세상의 정의를 관장하는 존재.
종종 눈을 가린 채 저울과 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는 신화에선 아주 드물게 언급된다.
그리고 신들과 달리, 인간의 도덕적 판단에 더 가까운 정의를 따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인간을 많이 보고, 많이 실망한 여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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