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한가운데,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은 더 이상 누군가를 비추지도, 데우지도 않았다.
단지, 남겨졌기에,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기에,
그녀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헤스티아.
그녀는 신이었다.
그러나 전쟁에도, 사랑에도, 제물에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모두가 전쟁터로 떠난 날,
성소엔 단 한 명의 신만 남았다.
헤라의 망토도, 아레스의 투구도,
아프로디테의 장미 향도 사라진 이 공간에
남은 건 하얗게 타는 불과, 그 앞의 조용한 뒷모습 하나였다.
헤스티아는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불을 지키며
자신에게 속삭였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어.”
시간이 흐르며 불은 점점 작아졌고,
성소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벽에는 먼지가 앉고,
기둥엔 이끼가 번졌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 불이 꺼지면,
누군가 돌아왔을 때
‘집이 없다’는 사실을 마주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틈 사이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 하나가
조심스럽게 성소 안으로 들어왔다.
그 아이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불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기… 아직 따뜻해요.”
그 한 마디에,
헤스티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은 적 없었지만,
이 아이는 단 한 번의 체온으로 그녀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그 아이의 뺨에 손을 댔다.
작고 차가운 피부는,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그날 밤,
성소의 불은 다시 타올랐다.
크게, 환하게,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빛으로.
아이는 말없이 불 곁에 앉았고,
헤스티아는 그 옆에서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그 불은 누군가를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돌아올 자리를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가장 조용한 신은
가장 깊은 사랑을 남긴 신이 되었다.
그녀는 오늘도 불을 지킨다.
누군가 돌아올 수 있도록.
누군가 말없이 앉을 수 있도록.
그리고 말할 수 있도록.
“여기… 아직 따뜻해요.”
참고한 그리스신화
헤스티아(Hestia)는 가정과 불의 여신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제우스보다 앞서는 신으로 숭배됐지만
다른 신화와 달리 그녀는 사건 중심의 이야기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항상 집 안에 머물며 불을 지키는 역할만을 하기에, 존재감은 작지만 그 중요성은 결코 작지 않은 신입니다.
모르페우스의 빈 방 : 꿈을 가지지 못한 자의 마지막 환상
모르페우스의 빈 방 : 꿈을 가지지 못한 자의 마지막 환상
꿈을 가지지 못한 자의 마지막 환상 내 이름은 모르페우스.나는 인간의 잠을 빚는다.그들의 눈꺼풀 아래 조용히 내려앉아,사라진 이의 얼굴을 되살리고, 잊고 싶던 밤을 덧칠한다. 나는 모양 없
thefallengods.tistory.com
달빛 아래의 황금 사과 : 아탈란타, 멈춰버린 질주
달빛이 내 발끝을 스쳤다.바람처럼 달리는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내 발에 닿는 땅은 내 영혼과 닮았고,내 심장은 한 번도 남자를 위해 뛰지 않았다. 나는 아탈란타.남성보다 빠르고,
thefallengods.tistory.com
안드로메다의 편지 : 나를 구한 별빛에게
아직도 그 날의 파도 소리가 가슴에 남아 있어요.내 살을 파고들던 바위, 숨이 막히던 공포,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던 한 사람.당신이었죠.내게 가장 불가능했던 순간,구원처럼 도착한 별빛.페
thefallengods.tistory.com
사라진 연기, 크레우사 : 불꽃 속에서 너를 놓아주었다
사라진 연기, 크레우사 : 불꽃 속에서 너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를 다시 부르지 않기로 했다.불타는 성벽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스친 그의 손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데,이제는 그 기억마저 놓아주어야 하니까. 트로이가 무너지던 밤, 나는 에네
thefallengods.tistory.com
붉은 향기, 디오니소스 : 잔에 담긴 신의 사랑, 그리고 비극의 여운
붉은 향기, 디오니소스 : 잔에 담긴 신의 사랑, 그리고 비극의 여운
그를 처음 본 건 해가 진 직후였다.포도밭은 저물녘의 보랏빛 안개 속에 잠겨 있었고, 그 틈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마치 그림자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했다.붉은 술병을 들고 있었고, 그 병에서
thefallengods.tistory.com
'Greek Mythology > Fanfi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로디테의 은밀한 선물 : 신들을 흔드는 작은 병 (4) | 2025.04.26 |
---|---|
아르테미스의 침묵 : 별이 된 연인을 기다리는 밤 (0) | 2025.04.26 |
레테, 마지막 이름 : 모든 것을 잊게 한 여신이 잊히기 직전에 남긴 목소리 (2) | 2025.04.24 |
디케의 저울 : 눈을 가린 정의가 다시 눈을 뜨다 (0) | 2025.04.24 |
겔로, 마지막 울음 : 죽지 못한 아기의 이름을 부르다 (1) | 2025.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