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다시 부르지 않기로 했다.
불타는 성벽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스친 그의 손이 아직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데,
이제는 그 기억마저 놓아주어야 하니까.
트로이가 무너지던 밤, 나는 에네이아스를 따라 달렸어.
아이네이아스.
내 남편.
그의 손엔 아스카니우스가 있었고, 등에선 아버지 안키세스를 업고 있었지.
나는 그 뒤를 따랐어. 단단하게 굳은 흙 위를 맨발로, 재와 피가 뒤섞인 공기 속을.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 나는 뒤처졌고, 이윽고 그는 나를 놓쳤어.
“크레우사!”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내 입술은 말라붙었고, 내 다리는 멈춰 있었어.
거대한 불꽃이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았지.
나는 알고 있었어.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가야 했고, 나는… 여기 남아야 했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밤은 단순히 도시가 무너진 게 아니었어.
그의 심장에서 나의 존재가 떨어져 나간,
그런 밤이었지.
나는 그들의 도망을 막으려는 병사들을 유인하기 위해 다른 골목으로 빠졌어.
남은 사람들에게 탈출로를 알려주고, 쓰러진 아이를 안고 길 끝까지 달렸지.
그리고 그 순간, 등에 불이 붙은 듯한 열기가 나를 휘감았어.
한순간이었어.
그 열기 속에서 나는 몸이 아닌 영혼이 태워졌단 걸 느꼈어.
내가 내 삶에서 분리되는 순간. 그것이 마지막 숨이었다는 걸.
그 뒤로, 나는 빛이 아니라 안개 속을 걷는 존재가 되었어.
도시 위를 떠도는 영혼. 미련을 품고 길을 잃은, 사랑의 잔재.
그가 나를 찾아 돌아왔을 때, 나는 이미 사람이 아니었어.
“크레우사…!”
그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처음 만났던 날보다 간절했어.
그리움이 아니라 죄책감,사랑이 아니라 상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안도하게 했어.
“내 사랑, 두려워하지 마요. 당신은 살아야 해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들을 위해서.”
그는 무릎을 꿇고 흐느꼈고,
나는 그 앞에 나타났지.
연기처럼, 달빛처럼.
그가 손을 뻗었을 땐,
나는 바람처럼 스쳤어.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같은 질감의 세계에 속하지 않았기에.
“당신에겐 새로운 땅이 기다리고 있어요. 새로운 사랑도, 운명도. 당신은 로마의 씨앗이 될 사람… 나의 길은 여기서 끝이에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숙였고, 나는 처음으로 그의 등을 보았어.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뜨겁고, 찬란하고, 슬펐어.
그래서 나는 울지 않았어.
나는 한 사람의 기억으로,
한 왕국의 시작점으로 남았어.
그 이름조차 잊히는 존재로서.
디도와 라비니아가 그의 가슴에 머무를 때에도 나는 그 뿌리에 남아 있었지.
그리고 오늘도 로마의 대리석 바닥 아래,
누군가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바람결에 속삭여.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래서 놓아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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