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reek Mythology/Fanfiction

바람의 얼굴, 헬렌 : 누구도 내게 묻지 않았다

by The Fallen Gods 2025. 4. 11.

바람을 쫓아가고 싶었다.
이름 없는 바다새처럼, 창백한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얼굴로 바람을 뚫고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데 바람은 내게서 얼굴을 돌렸다.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나는 정말 원했느냐고.

“너는 누구의 아내인가?”

그 질문은 늘 따라다녔다.
나는 스파르타의 왕비였고, 파리스의 연인이었고, 수천 명의 남자들이 죽어간 원인이었고,
이름 앞에 ‘아름다움’이란 굴레를 달고 태어난 여자였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날, 나는 파리스를 처음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불확실한 자유가 있었고, 나는 그 속에 뛰어들었다.
누구도 나를 소유하지 않기를 바랐고, 누구도 나를 닮지 않기를 바랐다.
그를 따라 떠날 때, 나는 스스로를 떠나는 기분이었다.


헬렌이라는 이름조차 두고 떠나고 싶었다.

트로이의 바람은 달랐다.
여기서 나는 “신들의 선물”이 아니라, “도둑맞은 여인”이었다.


이 도시의 탑과 황금빛 기둥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름 없는 새처럼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파리스는 말했지.

“너를 위해 전쟁도 감수할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바란 것은 전쟁이 아니라, 조용한 평화였다.
내 입술이 만든 침묵이 무수한 함성으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매일 밤, 내가 정말 입을 열었는지조차 의심했다.

 

전쟁은 길었고, 사랑은 지쳤다.
파리스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그의 눈동자에서 자유가 빠져나간 자리에 후회가 들어찼다.
나는 더는 그가 나를 보는 눈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도 나는 매일매일 이름을 불렸다.


헬렌.
헬렌.
헬렌.

 

누군가는 내 이름을 저주했고,
누군가는 내 이름에 영광을 실었다.
하지만 아무도, 정말로 아무도 내 손을 잡고 “괜찮아?”라고 묻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아프로디테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왔다고 들었다.
그 여신은 내게 사랑을 약속했고, 영원을 속삭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 기억은 마치 누군가 다른 여자의 것이다.
나는 헬렌이지만, 또 헬렌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래 위를 걷는다.


이제는 파리스도, 메넬라오스도 없다.
그들의 목소리는 전쟁의 뒷편 어딘가에 묻혀 있다.

 

가끔 나는 거울을 본다.
그 안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하지만 나는 묻는다.

“정말 이 얼굴이 이유였을까?”

나는 그냥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의 언니였고,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누군가의 증오였고,
누군가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였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본 적은 없지만, 누구도 묻지 않았으니 말할 수 없었던 거다.

지금도 나는 바람을 기다린다.
언젠가 내 이름을 몰라도 내 목소리를 들어줄 누군가를 위해.

“헬렌.”

그 이름,

언젠가 조용히 내려놓을 수 있기를.
누구의 것이 아닌 나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날이 온다면,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헬렌이었고, 나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