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본 건 해가 진 직후였다.
포도밭은 저물녘의 보랏빛 안개 속에 잠겨 있었고, 그 틈에서 걸어오는 남자는 마치 그림자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했다.
붉은 술병을 들고 있었고, 그 병에서 풍겨온 향기는 숨결을 따라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대, 이 향기 속에 몸을 담가볼 생각은 없소?”
그 목소리는 술보다 더 깊고, 어딘가 깨진 듯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부터 그의 눈동자에 나는 사라질 수 없는 색으로 남았다.
나는 마이라.
이 작은 마을에서 포도밭을 돌보는 여자.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때 할머니 무릎에서 듣던 전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 그는 전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날 밤, 그는 나를 데리고 올리브 나무 아래에 앉았다.
잔 하나를 꺼내더니 술을 붓고, 손가락으로 가장자리를 따라 문질렀다. 붉은 액체가 잔 안에서 빛났다.
“이건 단순한 와인이 아니오. 이건 내 기억, 내 환희, 내 슬픔, 내 피요.”
나는 웃었다.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남자는 처음 봐요.”
그는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여인을 다시 만난 것처럼.
그의 눈빛은 축제의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이내 허무처럼 식어갔다.
“사랑이라는 것이, 늘 나를 삼켜버리거든.”
그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에 닿았고, 나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안겨, 와인 향기 가득한 가슴팍에 숨을 묻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햇살 아래의 포도송이처럼, 그는 나날이 내 안에 달아올랐다.
밤마다 우리는 술을 마시고, 사랑을 나누고, 때로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점점 나는 그가 신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엔 시간의 무게가 있었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전쟁과 광기, 죽음과 축제가 얽혀 있었다.
“넌 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거죠?”
내가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술잔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마시면… 나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
그 순간, 머릿속에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도, 인간은 신의 시간을 견딜 수 없단다.”
나는 그의 술잔을 바라보았다.
붉은 와인이 잔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그의 사랑과, 광기와, 끝없는 시간이 담겨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
“그래… 네가 나를 잊을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내 손에 조그만 병 하나를 쥐여줬다.
“이건 네 기억이야. 마시면, 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어.”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바람 속으로, 달빛 아래로, 포도잎 사이로 흩어져버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이 포도밭에 살고 있고, 병은 꺼내지 않은 채 창고 어딘가에 숨겨두었다.
밤이면 때때로 그가 남긴 향기가 문틈을 타고 스며들어오고, 나는 그 병을 꺼내어 조심스레 바라본다.
마시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와인 안에는 아직도 그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마지막 숨을 쉬게 되는 밤엔, 나는 그 병을 열고, 한 모금 마실 것이다.
그때 나는 다시…
디오니소스를 마시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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